![실기의 대가: 1990년대 일본 재정정책이 남긴 엇박자의 교훈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031321473103554c1c16452b012411124362.jpg&nmt=18)
당시 재정정책은 자산 가격 버블 붕괴로 촉발된 민간의 디레버리징(Deleveraging) 압력을 완화하고 총수요의 급격한 위축을 보완하고 신용이 필요한 부문으로 원활히 흐르도록 함으로써 위기 확산을 차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었다.
버블 붕괴 직후 일본 정부는 대규모 공공투자를 통해 총수요를 떠받치는 확장 기조를 견지했지만 이러한 정책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경기 회복세가 충분히 안착하기도 전에 재정 건전화라는 목표에 집착하여 긴축으로 선회하는 과정을 반복한 결과 재정정책은 민간 수요의 회복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기보다 오히려 그 동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 정점은 1997년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의 이른바 ‘재정 구조개혁’이었다. 당시 정부는 누적된 재정적자와 인구 고령화에 따른 사회보장 지출 증가 전망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소비세 인상과 감세 종료 그리고 사회보험료 인상을 동시다발적으로 밀어붙였다. 재정 건전성 확보라는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민간 소비의 위축과 경제의 기초 체력 저하라는 더 큰 위험을 간과한 결과였다.
문제는 긴축의 시점과 방식이었다. 자산 가격 급락 이후 가계와 기업은 훼손된 대차대조표를 복구하기 위해 지출을 줄이고 부채 상환에 집중했다. 이러한 디레버리징 행태가 확산되면서 경제는 이른바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민간 부문이 부채 축소를 통한 생존을 위해 소비와 투자를 극도로 억제하는 상황에서 정부마저 재정지출을 줄이고 조세 부담을 늘린 것은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총수요는 이 거대한 역풍 앞에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회복 기미를 보이던 실물 경기는 다시 하강 국면으로 곤두박질쳤고 이는 곧 기업 실적 악화와 은행 부실채권 급증으로 이어졌다. 결국 경제를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시도한 재정 긴축이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을 오히려 심화시키고 위기의 골을 깊게 만드는 자기 강화적 악순환(Self-reinforcing Vicious Cycle)의 고리를 형성했다.
이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적 틀은 노무라연구소의 리처드 쿠(Richard Koo)가 제시한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 이라는 개념이다. 그는 자산 가격 폭락으로 인한 가치 하락이 경제주체의 대차대조표에 고스란히 반영되는 반면 부채의 명목 가치는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자산 가격 하락으로 순자산이 급감하면서 대차대조표가 훼손된 경제주체들은 생존을 위해 행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된다. 즉 이윤 극대화라는 정상적인 목표 대신 ‘부채 최소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이 국면에서는 금리를 아무리 낮춰도 민간은 차입과 투자를 회피한다. 갚아야 할 빚이 자산 가치를 상회하는 상황에서 추가 대출은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특히 1990년대 일본은 자산 거품 붕괴의 충격이 워낙 컸던 탓에 민간 부문의 심리적·경제적 위축이 단순한 경기 순환 차원을 넘어 장기간 지속되는 구조적 고착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신용경색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신용경색이 금융기관의 대출 기피로 인한 ‘공급의 경색’이라면 대차대조표 불황은 민간의 자금 수요 자체가 사라지는 ‘수요의 실종’이기 때문이다. 이 국면에서는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고 유동성을 공급해도 정책 효과가 실물 경제로 파급되지 못한다. 민간은 추가 차입을 통한 투자보다 빚을 갚아 파산을 면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결국 통화정책이라는 전통적인 처방은 무력해지고 경제는 구조적인 유동성 함정과 만성적인 수요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민간이 지출을 멈춘 상황에서 재정마저 지갑을 닫는다면 경제 활동은 그 자체로 동력을 잃고 끝없는 하강 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정정책은 붕괴된 민간 수요를 보완할 사실상 유일한 보루였다. 이는 아래 그래프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가계와 기업이 필사적으로 부채를 줄여나가는 동안 정부 부채는 반대로 급격히 늘어나는 상반된 궤적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민간이 감당해야 할 디레버리징의 충격을 국가 재정이 대신 흡수하며 경제 전체의 파국을 막아내는 ‘방어막’ 역할을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재정정책이 민간 수요의 공백을 상당 부분 방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빈번한 정책 단절과 조기 긴축으로의 선회는 대차대조표 불황의 늪을 탈출하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정책 기조가 일관성 없이 냉온탕을 오가자 시장에는 정부의 경기 부양 의지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자리 잡았다. 재정 부양 조치가 언제든 철회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민간의 소비와 투자 심리를 더욱 위축시켰고 이는 재정 승수 효과를 반감시켜 불황의 터널을 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려는 성급한 시도는 매번 경기 둔화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경기가 꺾이면 세수는 다시 줄고 추가 부양책을 써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재정 건전화를 추구하려던 노력이 오히려 재정을 악화시키는 ‘재정의 역설’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997년의 긴축 전환은 단순한 실책을 넘어 정책 우선순위 설정의 오류로 볼 수 있다. 누적된 재정적자와 인구 고령화라는 구조적 부담을 고려할 때 긴축 자체는 언젠가 마주해야 할 과제였으나 민간이 처절한 디레버리징을 겪는 와중에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그 타이밍은 최악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성급한 시도는 경기 안정과 금융 시스템 회복이라는 가장 시급한 방어선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위기의 장기화를 촉발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일본 재정정책이 남긴 뼈아픈 교훈은 정책의 지향점 그 자체보다 경제의 기초 체력을 고려하지 못한 정책 타이밍의 문제에 있었다.
재정정책의 한계는 집행 방식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당시 사회간접자본(SOC) 중심의 공공투자 확대는 자산 버블 붕괴로 직격탄을 맞은 건설·부동산 부문의 고용과 소득을 지탱하는 완충 장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공투자 확대는 금융 시스템의 근본적인 치유를 지연시키며 구조조정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막대한 재정 투입이 금융기관의 대출 연장과 결합되면서 시장에서 퇴출당해야 할 부실기업들이 연명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이른바 ‘좀비기업’들이 재정 지출에 의존해 생존하면서 은행의 부실채권 정리는 차일피일 미뤄졌고 그 결과 경제 전반의 자원 배분 효율성은 크게 저하되었다. 재정정책이 당장의 파국을 막는 방패가 되었으나 동시에 산업 생태계의 체질 개선을 저해하는 족쇄로도 작용했다.
나아가 공공투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정치적 유인과 결탁한 비효율을 낳았다. 대규모 토건 사업은 정치인들의 선심 쓰기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미 인프라가 포화 상태였음에도 미래 성장 동력을 위한 질적 투자 대신 '어디에도 닿지 않는 다리' 같은 비생산적 사업에 막대한 세금이 낭비되었다.
2002년 미 연준(FRB) 보고서가 지적하듯이 당시 일본은 사회간접자본 투자 수준이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만큼 재정지출의 방향을 사회간접자본 투자 중심에서 보다 생산적인 부문으로 과감히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단순 토건 사업 대신 사회안전망 강화나 노동자 재교육에 예산을 투입했더라면 기업의 과잉 고용 부담을 덜고 구조조정을 촉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신산업으로의 인력 이동도 더 앞당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1990년대 일본 재정 지출은 정치적 선심 쓰기식 토건 사업에 가로막혀 지출의 질적 구조를 바꿀 결정적 시기를 놓쳐버렸다. 재정 지출이 사회안전망이나 인적 자본 투자 같은 생산적인 마중물 역할을 하는 대신 비생산적인 곳에 낭비되면서 위기의 장기화를 자초한 셈이다.
결국 1990년대 일본의 재정정책은 경기 하강을 방어하는 동시에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는 이중적 성격을 띠었다. 단기적으로는 위기의 급격한 확산을 억제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금융 시스템의 회복을 늦추며 위기를 장기화시켰다.
이는 재정 지출의 규모 자체보다 자산 가격 붕괴 이후 민간이 부채 축소에 나서며 수요가 급격히 위축된 상황에서 재정이 그 공백을 충분히 메우지 못한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여기에 재정 지출이 공공투자에 과도하게 집중되면서 소비와 고용으로의 파급 효과가 제한된 점도 위기의 장기화를 심화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사회안전망의 취약성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더해졌다. 미 연준의 분석처럼 일본은 사회안전망이 취약해 재정 지출이 경기 변동에 탄력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불황기에 재정 지출이 자동으로 늘어나 경기를 뒷받침하는 ‘자동안정화 장치(automatic stabilizers)’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재정은 경기 하강에 둔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의 재정 정책은 외형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경기 조절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 재정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일부에서는 ‘리카도 대등정리(Ricardian Equivalence)’를 근거로 정부 부채 증가가 민간 소비를 위축시켰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즉 국채 발행을 통한 재정 확대가 미래 세금 인상에 대한 예상으로 이어지면서 민간이 소비 대신 저축을 늘려 정책 효과가 상쇄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은 당시 일본 경제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소비와 투자의 급격한 위축은 미래 세금에 대한 우려라기보다 자산 가격 붕괴 이후 훼손된 대차대조표를 복원하려는 민간의 강한 디레버리징 압력에서 비롯된 측면이 컸다. 미 연준 역시 1990년대 일본에서 가계 저축률이 하락하고 장기 금리가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재정지출이 민간 소비를 구축했다는 가설의 타당성이 낮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재정정책의 설계 자체도 대차대조표 불황이라는 특수성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회안전망이 취약하고 고령화에 따른 장기 재정 부담까지 겹치면서 재정당국은 대규모의 지속적인 지출 확대에 나서기 어려웠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정규 예산을 통한 본격적인 대응 대신 추가경정예산을 중심으로 공공사업과 한시적 감세 등 필요 시 쉽게 철회할 수 있는 단기적·가변적 수단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기적이고 가변적인 수단은 재정정책의 경기 부양 효과를 약화시켰다. 항상소득 가설(Permanent Income Hypothesis)이 시사하듯 소비는 일시적 소득보다 장기 기대소득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정책은 가계의 기대소득을 높이지 못했고 민간 지출을 충분히 자극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의 재정정책은 투입된 규모에 비해 민간 수요를 견인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이 같은 재정정책의 한계는 통화정책과의 엇박자 속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일본은행이 완화적 기조를 표방했음에도 그 강도는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성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 재정이 긴축으로 급선회하던 결정적 국면에서 통화정책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 ‘정책 불협화음’은 치명적이었다.
부실채권 문제로 금융 시스템이 마비된 국면에서 재정이 긴축으로 선회했음에도 통화정책은 충분히 완화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로 인한 거시정책 간의 엇박자와 재정정책의 일관성 결여는 정책 효과를 제약했고 막대한 재정 투입에도 불구하고 성장 회복은 지연된 채 정부 부채만 누적되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재정정책은 파국을 막는 ‘방패’로서는 일정 부분 기능했지만 자생적 회복을 이끄는 ‘엔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재정 자금 투입으로 마련한 회생의 기회는 구조개혁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소진되었고 그 대가로 일본 경제는 높은 정부 부채와 장기 침체라는 이중의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일본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단순하지 않다. 재정정책은 위기 대응의 핵심 수단이지만 그 성패는 지출 규모 자체보다 언제, 어떤 환경에서, 어떤 정책과 결합되느냐에 의해 좌우된다. 특히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고 민간이 부채 축소에 나서는 대차대조표 불황기에는 재정이 총수요를 지탱하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으로 기능하며 그 기조의 변화는 경기의 향방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재정 건전성에 대한 집착 속에서 경기 회복의 기반이 충분히 형성되기도 전에 긴축으로 선회했다. 그 결과 재정은 위기의 충격을 완화하는 데에는 기여했지만 회복을 지속시키는 역할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성급한 긴축은 회복을 지연시키고 침체를 고착화시켰으며 이는 1930년대 초 미국의 정책 실패가 대공황을 심화시킨 사례와 매우 유사하다. 당시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행정부는 균형 예산이라는 교조적 신념에 매몰되어 경기 침체기에 조세를 인상하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고 미 연준 역시 금본위제 수호를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 팽창해야 할 통화량을 오히려 방치하는 긴축적 태도를 견지했다. 실물과 금융 양측에서 동시에 진행된 이 치명적인 정책적 역행은 민간의 가처분 소득과 유동성을 고갈시켰으며 결국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파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결국 1990년대 일본의 사례는 재정정책의 지향점보다 ‘타이밍’과 ‘정책 조합(Policy Mix)’이 위기 극복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재정은 위기의 충격을 흡수하는 ‘방패’가 될 수 있지만 잘못된 시점에 후퇴할 경우 침체를 고착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바로 그 과정에서 일본 경제는 단순한 경기 변동을 넘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장기 저성장의 궤도로 진입했다.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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