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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회 칼럼] 변화 미루면 눈덩이 청구서로 돌아온다

장종회 기자

jhchang@fntimes.com

기사입력 : 2026-04-27 00:00

잘 나가던 독일이 한국에 보내는 경고

[장종회 칼럼] 변화 미루면 눈덩이 청구서로 돌아온다
[한국금융신문 장종회 기자] 2021년 12월,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16년 집권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올 때 세계는 찬사를 보냈다. 유럽 재정위기와 난민 사태를 헤쳐온 '무티(Mutti·엄마)'의 퇴장은 한 시대의 완성처럼 보였다. 그 때만 해도 독일은 흔들리지 않는 유럽의 중심이었다.

그로부터 5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그 평가는 완전히 뒤집혔다. 독일 제조업의 심장 폴크스바겐은 창사 88년만에 드레스덴 공장의 문을 닫았다. 화학 거인 바스프(BASF)는 87억 유로(약 100억 달러)를 투자해 중국에 생산거점을 구축했다. 본사는 그대로지만 미래 성장 기반은 독일에서 빠져 나갔다.

독일의 산업생산은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고,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 덮쳤다. '유럽의 엔진'은 어느새 '유럽의 병자'로 다시 돌아갔다. 이건 단순한 경기 침체 얘기가 아니다. 한 때의 성공이 어떻게 잘 나가던 한 나라의 성장 근육을 녹여 버리는 지를 보여준다.

개혁을 잠재운 번영

지난 10여 년 독일의 번영은 메르켈의 작품이 아니었다. 그 뿌리는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아젠다 2010'이다. 정치 생명을 건 고통스러운 노동 개혁이 핵심이었다.

결국 지지층의 거센 반발로 슈뢰더는 정권을 내줬지만 그 덕에 독일은 유연한 노동시장이란 무기를 얻었다. 독일 실업률은 2005년 11%에서 2010년대 중반 5% 아래로 내려갔다. 경상수지 흑자는 GDP의 7~8%까지 치솟을 정도로 쾌속 질주했다.

문제는 그 뒤였다. 메르켈 시대로 접어든 독일은 넉넉해진 곳간에 더 이상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잘 돌아가는데 왜 굳이”라는 안일함이 모든 걸 멈춰 세웠다. 산업 구조변화와 디지털 전환은 뒤로 밀렸다. OECD 기준 독일의 디지털 경쟁력은 주요 선진국 가운데 하위권으로 처졌다. 번영이 마취제가 된 셈이다.

가장 치명적인 실책은 에너지였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진 이후 메르켈은 전격적인 탈원전을 선언했다. 원전 공백은 저가의 러시아산 가스로 채웠다.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업고 내린 결정이었다. 독일에서 쓰는 가스의 절반 이상을 러시아에서 들여 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상황은 돌변했다. 에너지는 상품이 아니라 무기가 됐다. 가스 가격은 한때 4배 넘게 뛰었다. 독일의 산업용 전기요금도 미국의 두 배를 넘어섰다. 에너지 가격이 치솟자 독일 제조업 경쟁력은 한순간에 증발했다. 비용 부담에 기업들은 하나씩 짐을 쌌다.

기술이 아니라 방향이 관건

독일은 기계와 화학의 나라다. 한 때 0.0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밀함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지금도 여전히 제조 기술에선 세계 최고다. 그런데 최고의 기술을 가진 나라가 왜 이 꼴이 됐을까.

테슬라가 자동차를 '바퀴 달린 소프트웨어'로 재정의하는 사이에 독일에선 내연기관의 피스톤을 더 정밀하게 다듬는 데 매달렸다. 방향이 달랐고, 결과는 냉혹했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독일 브랜드의 점유율은 빠르게 잠식됐다.

과거의 성공이 기준이 되면 미래의 변화는 위협이 아닌 소음으로 들린다. 독일이 소음으로 여긴 건 거대한 변화의 신호였다. ‘성공한 엔지니어의 오만’이 그 변화를 읽지 못하게 만들었다.

강점이 족쇄가 되는 순간

지난 1976년 법제화한 독일의 공동결정제도는 노사 화합의 상징이었다. 전략결정을 감독하는 감독이사회 의석 절반이 노동자 대표로 채워져 노사 협력을 통한 생산성 개선을 추구했다. 대전환기가 되자 이게 족쇄로 변했다. 사업 재편·인력 재배치라도 할라 치면 감독위원회 동의를 얻느라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는 새 글로벌 시장 주도권은 날라갔다.

구조조정과 산업 전환이 요구되는 시기엔 합의와 결정의 속도가 곧 경쟁력이다.

글로벌 시장에선 몇 달의 차이가 시장점유율을 가른다. 지금 같은 급격한 패러다임 전환 앞에서 허송세월은 금물이다. 강점이 약점으로 둔갑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지금 한국 경제도 표면은 나쁘지 않다. 반도체는 글로벌 시장에서 패권을 지키고, K-방산은 수년째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가며 세계를 누빈다. 조선업 수주도 살아나 호황을 맞았다.

이 지점에서 냉정하게 자문해봐야 한다. 이것이 온전히 실력인가, 환경이 준 선물인가. 상당 부분은 미·중 갈등, 공급망 재편이라는 외부 변수가 한국에 기회의 창을 열어준 때문이 아닌가. 메르켈 시절 독일도 똑같은 착각에 빠졌었다. 중국 성장기에 기계와 자동차를 팔며 얻은 번영을 구조적 경쟁력으로 믿었다. 그 오판이 개혁의 골든타임을 날려버렸다. 한국도 지금 분위기에 취해 운을 실력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필요한 건 명확한 기준

메르켈의 독일이 빠졌던 함정을 피하려면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게 필요하다.

먼저 에너지 정책에서 이념을 걷어내야 한다. 원전이냐 재생에너지냐라는 이분법적 논쟁은 사치다. 순전히 산업경쟁력과 에너지안보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를 돌리는데 드는 전력량은 막대하다. 그러니 전력 단가가 곧 경쟁력이다. 어떻게 안정적이고 값싼 전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를 물어야 한다.

노동도 보호냐 유연화냐를 두고 싸울 때가 아니다. 이미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는 마당이다. 사양산업에서 성장산업으로 인력이 흐르지 못하는 국가는 도태된다. 이동성을 높여야 산업 전환 속도를 따라갈 수 있다.

이제 산업정책은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생존의 이슈가 됐다. AI, 디지털 자산 등에 각국이 역량을 총동원하는데 5년도 못갈 정책으로 장기투자를 이끌어내긴 어렵다. 정권과 무관하게 지속될 중장기 로드맵이 절실하다. 정치가 해야 할 몫이 바로 거기 있다. 기업이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사업과 투자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시한부 기회 살려야

독일은 무능하거나 실패해서 추락한 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너무 성공적이어서 뒤처졌다. 번영의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나기까지 알면서도 변화를 미뤘다. 그 비용은 사라지지 않고 쌓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복리로 불어난 청구서가 한꺼번에 날아왔다.

지금 한국이 손에 쥔 기회도 다르지 않다. 반도체도, 방산도, 조선도, 지금의 위치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운을 체질로 바꾸지 못하면, 다음엔 반드시 역풍을 맞는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흐른다. 지금 당장 우리는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장종회 한국금융신문 기자 jh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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