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400조원 시대에 사업자 중 증권사 비중은 4분의 1 수준으로 추격자 위치에 있다. 그동안 증권사는 사전예약부터 현금 등 각종 경품을 앞다퉈 내걸었다. 또 장기 연금투자에서 중요한 비용 측면에서도 IRP(개인형퇴직연금) 운용·자산관리 수수료 '제로(0)' 및 인하를 배치했다.
증권업계는 ‘머니 무브(money move)’를 흡수하기 위해 점증하는 투자형 수요에 맞춰 연금 상품 라인업을 확대하고 있다. 또 ETF(상장지수펀드) 적립식 자동투자 서비스를 퇴직연금 계좌까지 확대하는 등 준비도 갖추고 있다.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는 기존 퇴직연금 계좌에 운용 중인 연금 상품 및 투자 포트폴리오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른 금융사로 옮길 수 있는 제도다. 그동안은 운용 중인 투자상품을 모두 매도해서 현금화하거나, 만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컸다. 새 제도에 따르면 이제 중도해지에 따른 불이익이나 환매 후 재매수 과정에서의 손실 등을 피할 수 있다.
퇴직연금 실물이전이 본격화되면 전통적으로 투자에 강한 증권업에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분위기가 높다. 실물이전을 원하는 고객은 기본적으로 적극 운용하려는 수요(니즈)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를 위해 퇴직연금 전용 채권 같은 경쟁력 있는 상품 라인업을 확대하고 고객관리 서비스 제공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또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증권사 특성에 맞는 투자 상품 라인업을 갖추고, 금융소비자들의 수요에 맞는 연금 서비스와 혜택을 꾸준히 제공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다만,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가 지각변동을 일으킬 지, ‘찻잔 속 태풍’이 될 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모든 상품이 이전 대상이 아니다.
신탁계약 형태의 예금, 원리금보장 ELB·DLB(파생결합사채), 공모펀드, ETF 등 주요 퇴직연금 상품은 대부분 실물이전이 가능하다.
반면, 디폴트옵션(초저위험), 보험계약형 원리금보장상품,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 만기매칭형 펀드 등은 실물이전이 불가능하다.
또 수관 금융기관에서 판매하지 않는 상품의 실물이전도 불가능하다. 실물이전 불가 상품이 1개라도 포함되면 옮길 수 없다.
한국금융신문이 금융감독원 통합연금 포털 퇴직연금 공시를 종합해보니, 2024년 3분기 말 기준 총 42개 사업자(은행+증권+보험)의 퇴직연금(DB(확정급여)+DC(확정기여)+개인 IRP) 적립금은 400조793억원이며, 증권 14개사의 비중은 24.13%(96조5328억원)이다.
미래에셋증권이 3분기 기준 적립금 27조3755억원으로 증권업계 사업자 중 1위를 기록했다. 미래에셋은 은행, 보험을 포함한 전체 사업자 중에서도 점유율 톱5였다.
미래에셋증권은 '투자하는 연금'을 모토로, 해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 글로벌 자산배분을 제공 중이다. 디지털 측면에서 MP(모델포트폴리오) 구독,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를 배치했다.
증권사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 2위는 현대차증권(16조8082억원)으로, 자사 계열사의 물량(78.19%)이 대거 반영됐다. 적립금 3위는 한국투자증권(14조4822억원), 4위는 삼성증권(14조1110억원), 5위는 NH투자증권(7조1866억원)으로 나타났다.
한국투자증권은 2024년 8월 퇴직연금 업권 최초로 'ETF 적립식 자동투자 서비스'를 퇴직연금계좌까지 확대했다.
자산관리 명가(名家)에 힘을 싣는 삼성증권은 지난 2021년에 퇴직연금 최초로 운용관리 수수료와 자산관리 수수료가 무료(단, 펀드 보수 등 별도 발생)인 ‘다이렉트 IRP' 신호탄을 쐈다. 증권업계 ‘제로(0)’ 수수료 경쟁에 불을 지폈다.
삼성증권은 가입 서류 작성 및 발송이 필요 없는 ‘3분 연금’ 서비스(개인정보 제공 및 약관 등 동의시간 제외)도 선보였다.
NH투자증권은 실물이전이 시행되는 10월 말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퇴직연금 고객에게 더 높은 금리를 제공토록 퇴직연금계좌에서 거래 가능한 장외채권을 엄선해 공급할 예정이다.
증권사로 퇴직연금 실물이전을 고려한다면, 실적배당형 강점에 비추어 원리금비보장형 수익률을 비교해 볼 만하다. 다만, 증권사가 상대적으로 우세했으나, 은행, 보험 대비 뚜렷한 운용 강점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금감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증권사 중 2024년 3분기 기준 원리금비보장형 1년 수익률이 가장 높은 곳은 DC(확정기여)형 기준으로 하나증권(14.42%)이었다. IRP(개인형퇴직연금) 1년 수익률 1위는 우리투자증권(구 포스증권)(18.37%)이었다. DB(확정급여)형은 KB증권(12.63%)이 1년 수익률이 가장 높았다.
연금이 장기투자라는 점에서 5년 수익률(원리금비보장형)로 비교하면, DC·DB형 1위는 각각 하나증권이 6.25%, 6.11%로 1위를 기록했다. 증권사 IRP 5년 수익률의 경우 대신증권(5.65%)이 가장 높았다.
심수연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 선임연구원은 '국내 EMP 펀드시장의 현황 및 시사점'(2024년 8월) 리포트를 통해 "EMP(ETF Managed Portfolio) 펀드는 분산투자로 변동성을 최소화해 장기투자 상품으로 적합한 만큼 퇴직연금 상품으로 매력을 갖추고 있다"며 "현재 많은 EMP가 퇴직연금펀드로 설정돼 있고 디폴트옵션에도 편입돼 있어 TDF(타깃데이트펀드)와 함께 향후 퇴직연금 시장 성장세에도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장기 연금투자에서 자산 배분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금융투자협회는 운용업계와 올해 9월 말 ‘디딤펀드’라는 공동 브랜드로 퇴직연금에 특화된 BF(밸런스드펀드) 유형 자산배분펀드를 도입하기도 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 연구위원은 '자산배분형 퇴직연금펀드: TDF와 TRF(타깃리턴펀드)' 리포트를 통해 "적립 단계에서 대표적 자산배분펀드는 TDF와 TRF이지만, 한국은 TRF 시장의 미성숙으로 인해 TDF 위주 디폴트옵션 시장이 고착화되고 있다"며 "자산배분펀드의 성공적 운용성과를 기반으로 우리 퇴직연금 운용체계의 획기적 변화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선은 한국금융신문 기자 bravebambi@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