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파타고니아의 설립자인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와 노스페이스의 설립자인 더그 톰킨스(Doug Tompkins)는 여행과 극한 스포츠, 등반을 즐기는 친구사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좋아했고 악전고투 끝에 정복했던 두 곳을 각각 자기들 회사의 브랜드로 삼았습니다. 그 중에 이본 취나드는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습니다. 1960년대에 주한 미군으로 근무했으며 북한산 인수봉에는 177m에 이르는 고난도의 거대한 크랙으로 이루어진 취나드 길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그가 개척한 등반루트죠.
청문회가 주는 교훈
각설하고, 며칠 전 이본 취나드가 여기자와 인터뷰하는 장면을 봤는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채무가 없는 경영과 친환경적 녹색경영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상에 오르고 보면 아무것도 없다. 그러기에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다.” 참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이본 취나드의 말이 아니더라도, 정상에는 사실 별게 없습니다. 오르기 전에는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는 무지갯빛 희망을 안고 오르지만 그것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더 아무것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래 머물지도 못합니다. 곧 내려와야 합니다. 이본 취나드는 이 말을 꼭 등산만을 가리켜 언급한 게 아닙니다. 기업 경영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로 했습니다. 정상의 기업이 되는 것 못지않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업경영을 하면서도 환경운동을 벌이는 사람입니다. 정상에 오르는 것 이상으로 과정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비단 등산이나 기업경영에만 유효한 게 아닙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본 취나드의 인터뷰를 듣는 순간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문회 풍경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총리나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청문회 말입니다.
총리나 장관이라면 나름대로 ‘정상’입니다. 평생을 쌓아올려 이제 막 그 정상에 오르려는 사람을 대상으로 이잡듯이 뒤지는 ‘한판 굿’이 벌어집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과정을 상처 없이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아니, 거의 없습니다. 있다면, 누구 말처럼 수도승 같은 삶을 살았거나 아니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며칠 전, 어느 자리에서 현재 잘나가고 있는 유능한 후배를 보고 어느 선배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습니다. “장관은 하지 말고 차관까지만 하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모두들 웃었지만 참 씁쓸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과 같은 청문회라면 선뜻 ‘정상’에 서겠다고 나설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따지고 캐묻는 국회의원을 포함해서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청문회가 이뤄지기도 전에 각 정당에서 의혹에 관한 성명서가 발표되고 이런 저런 내용이 확인되지도 않은 채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미 만신창이가 됩니다. 개인의 능력과 자질을 검증하기보다 신변의 잡다한 것을 침소봉대해서 물고 늘어지는 데 당해낼 장사가 없습니다. 그러고라도 청문회를 통과하면 다행인데 그냥 취임도 못하고 낙마해버리면 그야말로 ‘끝장’입니다. 후보가 되지 않았던 것만도 훨씬 못합니다. 설령 어렵사리 통과한다고 해도 상처뿐인 영광일 게 뻔합니다. 해명이 된다고 해도 국민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는 것은 ‘해명’이 아니라 제기됐던 ‘문제’입니다. 앞에서 말한 모임에서는 이런 말도 오갔습니다. “장관 1~2년 하겠다고 그 수모를 당할 필요가 있냐”고 말입니다. 정상에 올라가보면 사실 별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바른 사회로 가는 진통
이제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청문회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당사자들로서는 억울한 경우도 많겠고 청문회 자체의 폐해가 없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인터넷의 발달, 내부고발 등으로 이제는 유리알 같은 투명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이본 취나드의 말처럼 정상에 오르는 ‘과정’이 중시되는 세상이 왔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점점 더 심할 것입니다. 시행착오와 더불어 몇몇 사람의 희생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습니다.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얼마간의 부작용은 바른 사회로 가는 진통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발전의 한 과정으로 봐야 하겠죠.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어떤가?”라고.
관리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