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업에 대한 규제는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소비자 보호의 관점에서 금융규제를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금융규제 중에서 소비자 보호를 위한 규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다른 업종에도 존재하는 수준을 넘지 않는다. 소비자가 입을 수 있는 잠재적인 피해 규모로만 보면 자동차나 주택의 매매, 항공 서비스의 거래가 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
금융업은 남의 돈을 위탁받아 운용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특별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는 견해도 타당성이 없다. 일반 기업이 회사채를 발행해서 차입을 하는 것도 남의 돈을 위탁받아 운용하는 것이다. 금융회사가 고객의 자금으로 계열사에 출자하는 것과 일반 기업이 차입금으로 계열사에 출자하는 것이 남의 돈으로 지배력을 확장하는 측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더욱이 금융회사에 대해서는 자기계열에 대한 투융자 한도를 자기자본의 일정비율 이내로 제한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추가적인 규제의 명분이 없다.
금융업에 대해 일반 업에는 없는 각종 규제가 가해지고 방대한 감독기구를 운용하는 진정한 이유는 시스템 리스크(systemic risks)에 있다. 금융회사가 부실화되면 그것이 해당 회사의 파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미노효과 내지 전이효과로 인해 건전한 금융회사도 파산하는 사태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고 그로 인한 금융경색이 국민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금융업이 시스템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는 이유는 자산과 부채간의 유동성 차이와 정보의 비대칭성(information asymmetry)에 있다. 금융회사의 부채는 예금주가 인출을 요구하면 그에 즉시 응해야 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 반면에 금융회사의 자산은 소액의 지불준비금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만기 이전에 회수가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은행의 경우 요구불예금은 물론이고 정기예금이나 적금도 만기전에 고객이 인출을 요구하면 이자면에서 다소 불이익은 있으나 즉시 요구에 응해야 한다.
그러나 은행이 기업에 빌려준 대출금은 약정된 만기가 도래하기 전에는 상환을 요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객들이 갑자기 예금의 인출을 요구하러 쇄도하는 뱅크 런이 발생하면 건전한 은행도 지급불능사태에 처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은행 하나가 파산하면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자신이 거래하는 은행의 건전성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지 못한 고객들은 실제로는 건실한 은행인 경우에도 불안한 마음에 예금을 인출하고 보자는 심리가 확산된다. 이로 인해 개별 은행의 파산이 은행업 전체로 확산되는 도미노 효과 내지 전이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 리스크의 가능성은 금융업 내에서도 업종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은행의 경우 가장 심하고 증권, 보험은 상대적으로 덜하며 카드업과 같은 경우에는 그 가능성이 일반 기업과 마찬가지 수준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자산과 부채간의 유동성 차이가 업종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보험의 경우 만기전에 해약을 하면 원금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고객이 만기전 인출을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또 자산도 대출이 아니라 유동성이 높은 유가증권으로 운용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에 인출 요구시 응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카드업의 경우 채권을 발행해서 자금을 조달하고,채권은 만기전 인출 요구가 불가능하므로 뱅크 런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난해 발생했던 카드채 사태는 카드회사의 시스템 리스크 문제가 아니라 펀드를 운용하는 투신사의 시스템 리스크 문제였다. 자신이 가입한 펀드에 부실 카드채가 얼마나 편입되었는지를 정확하게 모르는 고객들이 펀드의 환매를 요구하는 사태가 확산되면서 펀드들이 연쇄적으로 지급불능 사태에 처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포드와 GM이 발행한 채권의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되면서 헤지펀드의 연쇄 파산과 시스템 리스크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바람직한 금융규제는 금융업종별 시스템 리스크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은행에 대해서는 가장 엄격한 규제를 적용해야 하나 보험과 증권에는 상대적으로 규제가 완화되어야 하고 카드업에 대해서는 일반 제조업과 다른 특별한 규제를 가하지 말아야 한다. 금융선진국인 미국이나 영국의 규제체계는 이러한 원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금융규제 체계는 이러한 기본원리에 어긋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가가 운영하는 강제적 예금보험제도를 모든 업종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가하면 금산법이나 금융지주회사법의 규제도 금융업종간의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요소가 다분하다.
최근의 금산법 개정 논의를 보면 이러한 점에 대한 지적은 없고 특정한 회사의 위반 사례를 놓고 소급적 처분명령의 도입 가능성에 대한 법적 논쟁만 무성하다.
더욱이 금융규제의 기본원리를 금융의 관점에서 입법당국에 이야기해주어야 할 금융전문가마저 법률전문가의 영역에 끼어들어 논리를 왜곡하는 아마추어적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금융전문가들이 규제를 선진화하는 데에 앞장서는 것이 아니라 직함을 활용해 왜곡된 논리를 전파하는 일에 몰두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는 한 우리 금융의 선진화는 요원하다.
관리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