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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포 홑이불 위에 떠오른 보름달

장종회 기자

jhchang@fntimes.com

기사입력 : 2026-05-27 07:47 최종수정 : 2026-05-27 07:54

류재춘 작가, 전통 직물 위에 K-수묵을 입히다

[한국금융신문 장종회 기자] 삼베 특유의 팽팽한 결이 손끝에 닿는 순간에도 붓은 멈추지 않았다.

먹빛은 직물의 올 사이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매끄러운 한지와는 전혀 다른 물성이다. 먹은 빠르게 번지다가도 어느 순간 멈춰 서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카메라는 붓질의 순간을 따라갔고, 천 위에는 둥근 원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시간을 품은 안동포 위로 마침내 보름달이 떠올랐다.

K-수묵화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류재춘 화백은 지난 23일 안동포 홑이불 위에 수묵 월화를 그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전통 수묵의 재료인 한지가 아닌 삼베 위에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미술계 안팎의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이번 작업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전통 직물과 전통 회화라는 두 유산을 한 화면 안에서 결합하려는 실험이자, 류 작가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연장선이다.

이날 류 작가는 안동포 협회 후원으로 만든 한복을 입고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안동포 한복은 한 벌 가격이 1000만 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3일 류재춘 작가가 전통 안동포 홑이불 위에 수묵화를 그리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지난 23일 류재춘 작가가 전통 안동포 홑이불 위에 수묵화를 그리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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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퍼포먼스를 본 이들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을 법하다. 퍼포먼스에 사용된 안동포는 얼마 전 안동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에게 선물한 바로 그 안동포 홑이불과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전통 방식 그대로 길쌈해 직조한 안동포였다.

외교의 현장에서 관계를 잇는 매개가 된 삼베와 예술의 캔버스로 변신한 삼베. 같은 재료가 비슷한 시기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다카이치 총리의 선물 이후 류 작가의 퍼포먼스까지 이어지며 안동포는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잊혀 가던 전통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안동포와 수묵의 만남

안동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번 퍼포먼스의 의미를 온전히 읽기 어렵다. 안동포는 대마를 재배해 삼굿 찌기, 삼 가르기, 베 짜기 등 수십 개 공정을 거쳐 완성하는 전통 마직물이다. 경북 안동 금소마을을 중심으로 이어져 온 이 직물은 조선시대 왕실에 진상될 정도로 귀한 섬유로 대접받았다. 흔히 유통되는 삼베와는 차원이 다른 문화유산이다.
흥미로운 점은 다카이치 총리의 고향인 일본 나라현 역시 전통 마직물 ‘나라사라시(奈良晒)’로 유명하다는 사실이다. 안동포 선물에는 단순한 기념품 이상의 문화적 맥락이 담겨 있었던 것.

외교 선물로 전달된 안동포가 ‘공동의 이해’를 상징했다면, 류 작가의 안동포는 ‘창조의 서사’를 담아냈다. 같은 직물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오늘의 의미를 되살린 것이다. 전통은 보존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 새로운 이야기와 결합할 때 비로소 사람들의 관심 속으로 들어온다. 류 작가 역시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안동포 위에 붓을 들었다.

낯선 물성 위에 펼친 먹빛

류 작가는 처음 안동포 위에 먹을 올렸을 때 당혹감과 경이로움이 동시에 밀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종이와는 전혀 다른 물성이어서 번지기도 하고 머금기도 했다”며 “무엇보다 결과물이 아름다워 놀랐다”고 했다. 평생 한지를 다뤄온 화가에게 삼베의 결 사이로 스며드는 먹의 감각은 완전히 새로운 언어로 다가왔다.

안동포의 내구성도 인상적이다. 한지 위의 먹은 물에 번질 가능성이 있지만, 안동포에 스민 먹은 세탁 후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천 년을 견디는 한지의 보존성에 안동포 특유의 강한 물성이 더해진 것일테다.

퍼포먼스 현장에서 안동포 관계자들은 류 작가가 일그러짐 없이 단숨에 둥근 보름달을 완성하자 감탄을 쏟아냈다. 류 작가는 “늘 마음속 달을 그리지만 형체가 흐트러질까 걱정했다”며 “잘 완성돼 다행”이라고 웃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오랜 수련 없이는 불가능한 일필휘지의 순간이었다.

박물관 밖으로 나온 전통

이번 퍼포먼스는 단순한 전시 이벤트가 아니다. 안동포를 박제된 유산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활문화로 되돌리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류 작가는 “안동포가 박물관 유리장 안에 머무는 유산이 아니라, 달을 띄운 예술 오브제로 사람들의 일상과 만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안동포 수묵화가 미술관 벽을 넘어 공관 접견실이나 생활 공간 속에서도 활용될 수 있다고 본다. 류 작가는 지난해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한국 작가 최초로 단독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달’이라는 보편적 이미지를 통해 중동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한 경험은 안동포 수묵화 역시 새로운 문화외교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류 작가 자신은 이번 퍼포먼스에 대해 “안동의 전통과 수묵의 만남을 넘어, 안동포 이불이라는 생활문화가 다시 일상 속으로 들어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예술을 미술관 밖으로 끌어내 삶의 공간 속으로 스며들게 하려는 그의 지향이 이번 퍼포먼스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전통 형식만 고수하면 과거의 재현에 머물고, 재료만 현대화 하면 정체성이 흐려진다. 수묵화가 오랫동안 안고 있던 이 딜레마를 그는 정면으로 돌파한다. 정신은 전통에서 가져오되, 재료와 매체는 과감하게 확장하는 방식이다. 안동포는 그 실험의 가장 최근 사례다.

권영호 안동시 역사문화박물관장은 지난 14일 개막한 류 작가의 전시회 축사에서 류 작가에 대해 “새로운 길을 가면 종종 이단아 취급을 받지만 그 외로움과 고통을 견디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는 “류 화백의 달과 수묵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정신세계의 표현”이라며 “전통 한국화의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실험을 멈추지 않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안동포 협회 역시 이번 협업을 통해 새로운 세대와 시장에 안동포를 알릴 수 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 강남 아톨로지에서 개막해 오는 6월3일까지 이어지는 류재춘 작가 '달과 수묵' 전시회 인터뷰 영상]

류 작가가 안동포 위에 띄운 달은 오래도록 남을 가능성이 크다. 먹빛은 삼베의 결 속 깊이 스며들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수묵이 한지 위에서 천 년을 견디듯 안동포 위의 달 역시 긴 시간을 버텨낼 것이다. 두 전통이 만난 자리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흔적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전통은 박제되는 순간 생명력을 잃는다. 새로운 실험과 만나야 다시 살아 움직인다. 수천 년의 삼베 위에 떠오른 보름달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류 작가는 현재 서울 강남 아톨로지(Artology)에서 《달과 수묵(Moon & Waves)》 초대전을 열고 있다. 이번 안동포 협업 작업 역시 향후 별도 전시와 문화 프로젝트로 이어질 전망이다.

장종회 한국금융신문 기자 jh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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