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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야 채워지고, 곁을 내줘야 새 사람이 오는 세상 이치에 순응하고자 합니다. 그 분이 정권교체를 이뤄주신 것으로 제 꿈은 달성된 것이기에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간곡한 당부 하나 드립니다. 우리는 저들과 다릅니다. 정권교체를 갈구했지 권력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사람을 찾아 헤맸지 자리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비선이 아니라 묵묵히 도왔을 뿐입니다. 나서면 “패권” 빠지면 “비선” 괴로운 공격이었습니다.
저의 퇴장을 끝으로, 패권이니 친문 친노 프레임이니 삼철이니 하는 낡은 언어도 거둬주시기 바랍니다. 비선도 없습니다. 그 분의 머리와 가슴은 이미 오래 전, 새로운 구상과 포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멀리서 그분을 응원하는 여러 시민 중 한 사람으로 그저 조용히 지낼 것입니다. 잊혀질 권리를 허락해 주십시오. 문재인 대통령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아름다운 퇴장 무색하게 한 복귀

대통령의 복심이라고 불리던 '양비'(양정철 비서관)는 2017년 5월 대선이 끝난 뒤 이 같은 말을 남기고 아름다운 퇴장을 택했다.
그가 퇴장하면서 남겼던 아름다운 글들은 그를 '의심하던' 많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퇴장의 변은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퇴장 선언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한 때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유려한 말들의 진정성도 퇴색했다.
그는 올해 초 국내로 복귀한 뒤 5월부터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원장 자리를 맡았다.
민주연구원은 민주당의 정책과 전략을 연구하는 곳이다. 양 전 비서관이 2년만에 집권 여당 씽크 탱크를 이끌게 되면서 세간에선 여당의 내년 총선 대비 체제가 꾸려졌다고 평가했다.
양 원장은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 전해철 민주당 의원과 함께 '3철'로 불렸던 인물이다. 문 대통령을 정치에 입문시킨 참모로 꼽히며, 대선 승리의 일등 공신 중 하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현재 정권 출범 초기의 기대감은 많이 후퇴했다.
정권의 지지율이 갈수록 떨어지고 정치와 경제 상황이 어려워진 탓에 양비의 복귀엔 자의 보다 타의가 많이 가미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여당의 싱크탱크 수장으로 간 양비

올해 5월 14일.
출근길에서 양정철 신임 민주연구원은 이 자리를 맡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다고 했다.
당시 그는 "문 대통령 임기 5년 동안은 완전히 야인으로 있겠다 생각했는데 뭐라도 보탬이 되는 게 필요하다 생각해 어려운 자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화합을 강조했다.
양 원장은 "당 안에 친문과 비문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면서 "총선 승리의 대의 앞에서 국민 앞에 겸허하게 ‘원팀’이 돼 갈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양 원장은 자신이 공천 물갈이 총대를 매고 온 것이 아니냐는 비문진영의 불안감에 대해선 "그런 걱정하는 분들이 있으면 걱정을 붙들어 매도 좋다고 하고 싶다"고 자신했다.
■ 양 원장, 한일 갈등을 당리당략에 이용한다는 비판 달게 받아야
양 원장은 원장 취임 당시 문재인 정부와 당 지지율 동반 하락과 한국당 지지율 상승과 관련해 여론조사 수치에 급급하기보다는 국민을 보고 멀리 보면서 뚜벅뚜벅 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7월 한일 갈등이 격화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놀랄 수 밖에 없었던 문건이 공개됐다.
민주연구원의 30일자 보고서 '한일갈등에 대한 여론 동향'엔 "여론에 비춰볼 때 (한일 갈등의 여당에 대한) 총선 영향은 긍정적일 것"이라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한일 갈등으로 나라 경제의 앞날이 극히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런 보고서를 써서 여당 의원들에게 돌렸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많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고서가 유출되자 민주연구원은 31일 "30일 당내 의원들에게 발송한 한일 갈등 관련 여론조사 보고서는 적절치 못한 내용이 적절치 못하게 배포됐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시국에 국회의원들에게 이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배포했다는 사실에 놀란 사람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한일 갈등을 '정쟁'에 이용하려한다는 비판이 많이 나왔다. 첨예화된 한일 갈등, 국가경제의 안위마저 당리당략에 활용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민주당 내부적으로 슬며시 이런 조사를 할 수 있지만, 여당 의원들에게 문건을 보낸 행위나 그 파장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들도 있었다.
아무튼 대통령의 복심이면, 국민을 최우선에 둬야 하건만 당의 안위만 걱정한 것처럼 보였다.
나라 경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한일 갈등을 부풀려서 여당에 도움이 된다면 '오케이'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 부적절한 시기에 부적절한 행동..국가 경제보다 당리가 우선인가
일본이 당장 다음달 2일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발표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앞으로 반도체 관련 3품목 외에 1천개가 넘는 품목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도 높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갈등이 당의 이익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논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하기 어렵다.
주가지수가 급락하면서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여당 씽크탱크가 이 같은 보고서나 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금융권에서도 정치인들의 몰신경한 태도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다.
증권사의 한 직원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하는 행태는 그 나물에 그 밥"이라며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자산운용사의 한 펀드매니저는 "정부의 행태가 한일 갈등 해결보다는 사태를 키우는 것처럼 보여 여당이 한일 갈등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지금은 들었던 촛불의 초가 다 타들어갔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일 갈등의 파장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사람이 당리당략에 몰두해 있었다면서 실망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증권사의 한 애널리스트는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영향이 어떨지 정확히 예견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저런 일을 벌이고 있으니 주식시장도 이 모양"이라고 말했다.
한 언론사 정치부 기자는 "2주전 공항에서 양 원장은 총선 승리를 위해 반일 프레임을 강화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지금 국익이 걸려 있고 경제가 어려운데 선거랑 어떻게 연결을 짓는가 라고 했다"면서 "그런데 자신이 원장으로 있는 여당 씽크탱크에서 어떻게 이런 문건을 버젓히 돌리냐"고 비판했다.
민주연구원은 "한일 갈등을 선거와 연결짓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이나 연구원의 공식 입장이 아닌 조사 및 분석보고서가 오해를 초래하지 않도록 보다 신중을 기하겠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같은 해명은 그저 초라한 변명처럼 들릴 뿐이었다.
장태민 기자 chang@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