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 회장은 CEO 경력만 곧 14년을 꽉 채우기 직전이다. 지난 91년 2월부터 97년 2월까지 신한은행장을 맡아 신한이 금융계 리딩뱅크로 올라설 수 있는 기반을 넉넉히 닦았다. 99년에서 2001년까지 외환위기의 풍파 속에선 신한은행 부회장으로서 일대도약기의 정신적 지주로 소임을 다했으며 이어 겸업화·대형화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금융지주사 창건의 중심축을 굳건히 했다.
그리고 신한금융지주 회장직 3연임의 순간이 성큼 다가왔다.
특히 다가올 3년은 후발시중은행이 은행권 수위를 다투는 금융그룹으로 클 수 있다는 신화에 더해 금융시장의 근본적 격변에 따른 업권 장벽 철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주목된다.
자본시장통합법 발효 이후의 금융산업은 겸업화 역량 업권의 장벽을 뛰어넘는 시너지 영업력이 판도를 좌우할 것이란 예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점포내 점포(BIB) 실험과 초우량 고객을 겨냥한 PB또는 웰스매니지먼트 영업에 은행 증권 보험의 시너지 극대화 시도를 한 데 이어 굿모닝신한증권의 증자까지 마쳐 놓은 터이지만 지금까지 포석이 새로운 정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효율성 극대화의 간명한 새 정석을 금융계는 기대하고 있다.
이같은 기대는 굿모닝증권부터 조흥은행과 LG카드에 이르는 인수합병 모범사례를 창출한 수순에 따른 학습효과로 비쳐진다.
또한 프랑스 최고 영예로 일컬어지는 레지옹도뇌르훈장을 2003년에 수상한 일도 예삿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국내 시중은행들은 부족한 겸업화 역량을 외국계 메이저플레이어와 손잡고 급속성장의 길을 걸었다. 신한은 그 가운데 프랑스 BNP파리바와 호주 맥쿼리와 인연이 깊다. 프랑스 정부는 BNP파리바와를 택한 그의 안목에 최고 훈장을 준 셈이다.
외환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뒤바꾼 채 완전 내수산업이던 한국금융산업을 글로벌 강자로 도약하는 과정의 브레인이자 동력의 근간이었던 라회장.
안으로는 가장 선진적 시스템환경으로 바꾸고, 밖으로는 비제조업 글로벌 최강 브랜드이자 기업으로 뻗어가려는 신한금융그룹의 선장으로 6년에서 3년을 더 보탤 예정이다.
힘든 고비나 위기를 맞을때 마다 그 어떤 후광이나 연줄없이 수읽기가 어려운 큰 싸움일수록 절묘한 타개를 연출했던 경험은 그의 대표 자산이다. 학력이나 지연보다 스스로의 열정과 성실이 업적으로 얼마나 꽃피우는가를 더욱 중시하는 신한 문화(신한뱅크 웨이)의 정점에 그가 있다.
대구은행에서 안주할 수도 있었을 그가 후발 시중은행 신한을 택한 것이나 바로 그 선택이 대한민국 금융계 선두를 놓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 강자출현의 결정적 역할을 한 과정은 그야말로 입지전적이며 강한 응집력으로 목표 실현을 앞당기는 무한의 원료를 생성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인호 사장의 임기를 2년으로 해서 신상훈 행장 임기와 맞춘 것 역시 신한답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혹자는 신상훈행장에게 대통을 넘기려하는 것으로 풀이하지만 끝까지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한, 이를테면 여백 또는 여운으로 보는 것이 맞다는 풀이가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한국 은행업은 전형적인 관계지향형 산업이다가 생사의 기로에 서서 구조조정을 거친 뒤, 가장 선진적시장에서 주도권을 다투며 글로벌 무대 성과로 진가를 겨루는 새로운 세대에 접어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한금융그룹이 누릴 영광은 라회장에겐 입신의 경지덕분이라는 조심스런 분석이 새어 나오는 것이다.
정희윤 기자 simmoo@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