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류 강박관념의 역설: 1990년대 일본은행의 실기와 미온적 대응 [김성민의 일본 위기 딥리뷰]](https://cfn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031321473103554c1c16452b012411124362.jpg&nmt=18)
일본은행의 초기 대응은 비교적 신속했으나 1994년을 전후로 정책 운용이 지나치게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경기 회복 조짐을 나타내는 일부 지표에 지나친 신빙성을 부여함으로써 추가 완화의 필요성을 과소평가한 데 따른 것이었다. 특히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과 급격한 엔고라는 이중 충격에도 불구하고 정책 대응은 시장을 선제적으로 이끌기보다 사후적으로 대응하는 뒷북 대응의 성격을 보였다. 정책금리가 0.5% 수준까지 인하된 것은 충격이 상당 부분 현실화된 이후였으며 이러한 조치는 이미 굳어진 경기 하방 기대를 반전시키기에는 그 강도와 규모 면에서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정책 대응의 한계는 1997~1998년 금융위기 국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대형 금융기관의 연쇄 파산으로 신용경색이 실물경제로 확산되는 상황에서도 일본은행은 도덕적 해이 방지와 금융기관의 자구 노력을 중시하는 신중한 기조를 유지했다. 그러나 위기의 성격이 개별 금융기관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접근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적시에 대응할 기회를 상실했다. 정책금리는 1998년 9월에야 0.25%로 인하되었고 제로금리정책(Zero Interest Rate Policy, ZIRP)의 도입 역시 1999년 2월까지 지연되었다.
결국 1990년대 일본의 통화정책은 미래 경기와 물가에 대한 판단을 바탕으로 시장 기대를 선제적으로 형성하는 ‘ahead of the curve’ 방식이 아니라 실제 흐름을 뒤늦게 쫓아가는 ‘behind the curve’ 접근에 머물렀다. 물가 안정에 대한 경직된 인식과 구조조정 우선 논리에 대한 집착은 정책 대응의 속도와 강도를 제약했으며 그 과정에서 디플레이션 기대는 점차 고착화되었다. 이는 단순한 정책 집행의 타이밍 문제라기보다는 중앙은행이 불확실성 하에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기대를 관리해야 하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정책 철학의 과제를 남겼다.
당시 일본은행의 행보에 대해서는 국내외 학계에서 비판이 잇따랐다. 핵심 쟁점은 정책 대응의 시기와 강도뿐만 아니라 비전통적 정책 수단의 도입과 인플레이션 목표제 채택을 완고하게 기피한 태도였다. 첫째, 대응이 지나치게 늦었다는 점이다.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일본 경제가 이미 유동성 함정에 진입하여 선제적 대응이 시급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통화당국이 인플레이션 재발을 과도하게 경계하며 결정적인 대응 시기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기대 인플레이션을 끌어올릴 만한 강력한 정책 약속이나 비전통적 수단이 제시되지 못했고 명목금리가 하락했음에도 실질금리는 충분히 낮아지지 않아 투자와 소비 회복이 제약되었다는 비판이다.
일본 학계의 실증 연구 역시 이러한 비판을 뒷받침한다. 간사이대학의 지누시 도시키 등은 정책반응함수 추정을 통해 일본은행이 두 차례의 결정적 정책 시기를 놓쳤다고 분석했다. 1995년 급격한 엔고 국면에서 추가 완화를 통해 경기 하방 압력을 완화할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플라자 합의 이후 이어진 엔화 강세는 1995년 달러당 80엔 수준까지 치솟으며 정점을 찍었고 이는 수출 기업의 수익성을 급격히 악화시키며 경기 하강 압력을 키웠다. 둘째, 1997년 소비세율 인상과 재정 긴축으로 총수요가 급격히 위축되었음에도 통화정책이 이를 선제적으로 보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이 재정건전화 기조 아래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인상하고 공공지출을 억제하는 긴축 정책을 강행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들의 분석에 따르면 제로금리정책은 도입 시점 역시 1999년 2월이 아니라 경기 하강이 뚜렷해진 1997년 무렵 이미 시행되었어야 했다.
결국 쟁점은 단순한 금리 수준이 아니라 자산 디플레이션과 금융 불안이 심화되는 국면에서 중앙은행이 시장 기대와 신용 여건에 얼마나 선제적으로 개입했는가에 있었다. 일본은행의 점진적 대응은 단기적으로 금융 시스템의 불안을 완화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디플레이션 기대의 형성과 고착을 억제하고 경기 하강이 추가적인 경기 위축을 낳는 악순환을 차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둘째, ‘충분히 완화적’이라는 정책 당국의 판단과 실질금리의 함정이다. 일본은행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자국의 통화정책이 이미 충분히 완화적이며 추가 완화가 1980년대식 자산 버블을 재현할 수 있다고 경계했다. 그러나 이는 실질금리와 신용 여건을 간과한 판단이었다. 1997년 소비세 인상에 따른 일시적 물가 상승기를 제외하면 명목 콜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실질 콜금리는 상당 기간 플러스 영역에 머물렀고 이는 총수요 회복을 제약하는 긴축적 환경에 가까웠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애덤 포젠(Adam Posen)은 디플레이션 기대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완만한 인플레이션 유도가 자산 버블로 이어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판단했다. 그는 디플레이션의 비용이 인플레이션 위험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들어 당국의 보다 과감한 확장 정책을 주문했다.
셋째, 명시적 인플레이션 목표제 거부와 정책 목표의 모호성이다. 벤 버냉키(Ben Bernanke)는 정책 목표의 불투명성을 일본 통화정책의 결정적 미비점으로 지적했다. 크루그먼과 포젠 역시 일본은행이 구체적인 수치 목표를 공표해 정책이 추구하는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크루그먼은 단기금리 인하 여력이 소진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금리 수준이 아니라 ‘미래 정책 경로에 대한 신뢰성 있는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일본은행은 기대 인플레이션 제고를 위해 자산 매입 확대와 더불어 고물가 용인 선언을 병행했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행은 이러한 명시적 확약을 회피함으로써 시장의 기대 형성을 차단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스스로 제약하는 패착이 되었다.
넷째, 비전통적 수단 활용의 지연과 정책 대응의 제약이다. 정책금리가 제로 수준에 도달한 이후에도 일본은행은 비전통적 수단 도입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버냉키는 일본은행이 유동성 함정을 통화정책의 무력화로 보는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았다. 장기자산 매입, 기대 경로를 활용한 적극적인 신호 전파, 환율 경로를 통한 완화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이 존재했음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은행의 이러한 태도를 ‘자기 유도적 정책 마비(self-induced paralysis)’로 규정하며 장기 침체의 상당 부분이 구조적 한계가 아니라 정책 선택의 결과였다고 평가했다.
다섯째, 구조개혁을 이유로 한 통화 완화의 소극성이다. 일본은행은 구조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해왔으며 특히 하야미 마사루 총재 재임기에는 ‘창조적 파괴’를 강조하며 부실 기업과 금융기관의 정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자산버블 붕괴 이후 일본에서 경기 회복을 위한 적극적 수요 부양과 구조조정을 통한 체질 개선 중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인지를 둘러싼 정계와 학계의 논쟁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
이러한 외부의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은행은 신중한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나름의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었다. 첫째, 경제 전반의 침체 원인을 통화 부족이 아닌 구조적 문제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일본은행은 경기 침체의 근본 원인을 실물 경제의 구조적 결함에서 찾았다. 기업은 수익성 있는 투자 기회를 찾지 못하고 은행은 부실채권 문제에 발목이 잡힌 상황에서 금리 인하만으로는 실질적인 경기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 아래 노동시장 유연화와 금융권 부실 정리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통화 완화는 효과가 제한적일 뿐 아니라 경제의 자생적 회복력을 저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 과도한 통화 완화가 초래할 부작용에 대한 경계감이 강했다는 점이다. 일본은행은 대규모 유동성 공급이 통제하기 어려운 인플레이션이나 1980년대 말과 같은 자산 버블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이러한 인식은 비전통적 수단 도입에 대해 지나치게 방어적이거나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하게 하는 논리적 배경이 되었다. 1999년 제로금리정책(ZIRP)은 일본은행이 중앙은행의 전통적 정책 틀에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라고 강조한 조치였다. 당시 정책위원이었던 우에다 가즈오와 야마구치 유타카 부총재 등 일본은행 내부에서는 이를 중앙은행의 금기 영역에까지 발을 디딘 파격적 결단으로 규정했다. 즉 일본은행은 비전통적 수단에는 선을 긋되 전통적 틀 안에서는 가능한 최대한의 완화를 시행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셋째, 인플레이션 목표제에 대한 회의와 신뢰 훼손 우려였다. 일본은행은 수치 목표를 설정한다고 해서 기대 인플레이션을 정밀하게 통제할 수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달성 경로가 불확실한 목표를 제시했다가 이를 지키지 못할 경우 중앙은행의 신뢰가 훼손될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다. 하야미 총재는 1999년 Financial Times 인터뷰에서 이러한 우려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또한 와세다대학의 와카타베 마사즈미에 따르면 당시 정책위원들은 인플레이션 목표제가 인플레이션 억제에는 효과적인 정책 수단으로 평가되었지만 디플레이션 대응 수단으로서의 선례가 부족하고 인플레이션 기대를 정밀하게 통제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인플레이션 발생 시 이를 다시 억제하는 데 상당한 비용이 수반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도입을 주저했다고 한다. 여기에 다카하시 고레키요 사례에서 비롯된 이른바 ‘다카하시 트라우마’ 역시 인플레이션 목표제 도입을 둘러싼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30년대 대장상이었던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적극적인 재정 지출과 통화 팽창으로 디플레이션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후 군부 압력 속에서 긴축으로의 전환에 실패하면서 인플레이션이 통제 불능으로 치달았고 이러한 경험은 정책 당국자들에게 강한 경계심을 남겼다.
넷째, 비전통적 수단의 효과와 제도적 제약에 대한 우려였다. 일본은행은 대규모 국채 및 민간 자산 매입과 외환시장 개입 등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더라도 그 정책의 효과와 시차 그리고 부작용을 사전에 정밀하게 평가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특히 국채 매입은 정부 재정 적자를 사실상 중앙은행이 떠받치는 것으로 시장과 일부 정책 담당자들 사이에서 인식될 소지가 있었고 이는 통화정책이 재정에 종속되는 ‘재정 종속(fiscal dominance)’으로 이어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외환시장 개입은 자국 통화 가치 하락을 통한 수출 경쟁력 확보 시도로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어 다른 국가의 부담을 초래하는 ‘근린궁핍화(beggar-thy-neighbor)’ 논란으로 확산될 여지가 있었다. 이처럼 비전통적 정책은 단순한 효과의 불확실성을 넘어 중앙은행의 정책 독립성과 대외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은행 내부에 강한 제약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섯째, 초저금리가 구조조정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일본은행은 지속 가능한 회복을 위해 부실 기업과 금융기관의 퇴출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과도한 통화 완화가 지속될 경우 사실상 생존 기반을 상실한 ‘좀비 기업’이 연명해 자본과 노동이 비효율 부문에 묶일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야마구치 유타카 당시 부총재는 반복적인 금리 인하가 금융기관의 구조조정 유인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러한 조치를 단기적 안정을 위해 장기적 효율성을 희생하는 즉 겉으로는 승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큰 대가를 치르는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에 비유했다.
또한 1998년 4월 일본은행이 대장성으로부터 법적 독립을 확보한 이후 내부의 보수적 정책 기조가 오히려 강화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제도적 독립성을 확보한 만큼 정부와 정치권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태도가 더욱 분명해졌고 이는 정책 운용에서 신중함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는 해석이다. 외환시장을 통한 적극적 유동성 공급에 소극적이었던 배경 역시 환율 정책을 관할하는 대장성과의 공조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가 상당 부분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결과적으로 일본은행의 선택은 단기 부양보다 중장기적 안정과 구조조정의 지속 가능성을 우선한 것이었으나 역설적으로 이는 ‘잃어버린 10년’의 장기화를 초래했다.
통화정책은 본질적으로 높은 불확실성을 수반한다. 경제 전망은 불완전하며 정책 효과를 사전에 확신하기 어렵다. 선제적 대응이란 이러한 불확실성을 감수한 채 내려야 하는 결단이다. 특히 당시 일본이 디플레이션이라는 전례 없는 환경에 직면해 있었음을 고려하면 일본은행의 신중한 태도 자체를 비합리적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신중함 자체가 아니라 그 정도와 방향성이었다. 당시 일본은행은 위험 관리에 과도하게 매몰되어 통화정책 본연의 목표를 망각했으며 결과적으로 보수성이 정책 판단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도한 보수성의 이면에는 정책 결정자들이 가졌던 무오류성에 대한 심리적 부담 혹은 실패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이 깊게 투영되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통화정책은 필연적으로 불확실성과 위험을 수반한다. 따라서 정책의 핵심은 과도한 위험 회피가 아니라 상충하는 다양한 리스크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내는 데 있어야 한다.
2000년대 초 워싱턴 근무 시절 미 연준 통화정책국을 떠나는 한 지인의 퇴직 파티에서 그의 동료들이 양팔저울 모형을 선물하던 장면을 직접 지켜본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통화정책 논의에 ‘위험의 균형(balance of risks)’이라는 개념을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정책 선택이란 어느 한쪽의 위험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니라 양쪽 위험이 한쪽으로 과도하게 기울지 않도록 끊임없이 무게를 조정하는 작업이라는 의미다.
1990년대 일본은행은 인플레이션 재발과 자산 버블이라는 과거의 경험이 남긴 부작용에 대한 경계에 치중한 나머지 디플레이션의 고착화와 장기 침체라는 현재의 위험을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했다. 저울의 한쪽 접시가 이미 바닥에 가까워지고 있었음에도 반대편으로 무게추를 옮기는 데 주저했던 그들의 신중함은 결과적으로 더 큰 위험을 방치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김성민 교수(전.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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