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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개인전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

장종회 기자

jhchang@fntimes.com

기사입력 : 2026-04-03 14:49

4월 15일 ~ 5월 11일 인사동 토포하우스
길 잃은 화살표…'관계의 방향'이 묻는 것

허준 작, 관계의 방향1, 34 x 226.5cm, 한지에 혼합재료, 2025

허준 작, 관계의 방향1, 34 x 226.5cm, 한지에 혼합재료,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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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융신문 장종회 기자] 화살표는 본래 단호하다. 앞을 가리키고, 길을 알려주며, 목적지에 당도할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인사동 토포하우스의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허준 작가(50)의 화살표들은 어딘가 수상하다. 분명히 화살표의 형태를 띄었는데 방향이 어느 쪽인지, 동서남북 어디로 향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듯 화면 위에서 꿈틀거린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곤충의 표피를 연상시키는 촘촘한 문양들이 화살표를 뒤덮고 있다. 그림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 끝을 향해 가다가 보면 어느새 출발점이 어디인지 모호해진다.

올해로 작업 경력이 20여 년에 이른 허준 작가가 개인전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를 오는 15일부터 5월 11일까지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연다. 이번에 열리는 전시는 허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인간관계라는 이슈를 화살표라는 기호 언어로 집약한 결과물이다. '관계의 방향' 연작이 중심이다.
허준 작, 관계의 방향2, 30 x 47.5cm, 한지에 혼합재료, 2023

허준 작, 관계의 방향2, 30 x 47.5cm, 한지에 혼합재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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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작업의 출발점은 동양화다. 윤곽선 없이 붓 한 자루로 형태를 완성하는 몰골법(沒骨法)과 다르게 그는 윤곽을 먼저 잡고 내부를 채우는 구륵법(鉤勒法)을 따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를 채우는 방식이 특별하다. 스케치도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이어지는 반복 패턴을 사용하는데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화면 위를 흐르는 듯하다. 꼭지점에서 시작해서 일정한 너비의 몸통을 지나면서 증식해가는 이 문양들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드러낸다.

전시회의 타이틀도 재미있고 의미심장하다. 'Wag the Dog(꼬리가 개를 흔든다)'라는 영문 표현에서 빌어온 것인데, 부차적인 게 본질을 좌우하는 역전 현상을 가리킨다. 허준은 화살표에서 그 역설을 발견하고 세심하게 표현했다. 허준의 화살표에서 시각적으로 두드러지는 부분은 넓게 퍼진 머리와 몸통이다. 꼬리는 형태상 구분이 없이 조용하게 따라올 뿐이다. 작가는 이 지점에서 묻는다.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인가, 보이지 않는 꼬리가 모든 것을 이끄는 건 아닌가” 지나간 과거가 오늘의 선택을 흔든다는 감각은 오십 줄에 접어든 작가가 뼈저리게 실감하는 바로 그것이다.
허준 작_관계의 방향6, 60.5 x 60.5cm, 한지에 혼합재료, 2023

허준 작_관계의 방향6, 60.5 x 60.5cm, 한지에 혼합재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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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에 대한 고민은 허준 작가가 오랜 기간 작업해온 기저다. 경기도 양평 에 있는 작업실 일대를 운전하며 마주치는 교통표지판, 농협 하나로마트 로고, 교차로의 이정표들이 그에게는 모두 관계의 은유로 읽혔다. 자동차에 달린 길잡이 네비게이션은 도로 위의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지를 가리켜 주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교차로에는 그런 안내판이 없다. 그가 작가 노트에서 "상실, 배신, 허무, 좌절, 미안함이 뒤섞여 있다"고 고백한 것은 서정을 표현했다기 보다 담담하게 현실을 담은 말이다.

독일 작가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이 벌레로 변해버린 낯선 모습을 인식하는 순간은 허 작가가 그려낸 화살표에도 담겨 있다. 캔버스 위의 나무와 화살표 사이 어딘가에 작가 자신이 숨어 있는 듯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맞닿은 관계, 서로 뒤엉킨 존재들이 허 작가가 그려내는 인간의 초상이다.

허준 작, 관계의 방향8, 72 x 72cm, 한지에 혼합재료, 2023

허준 작, 관계의 방향8, 72 x 72cm, 한지에 혼합재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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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작가에게 그림은 몸을 움직여 세계와 부딪히는 행위이다. 스케치북에 남긴 일상의 낙서들도 같은 맥락에 있다. 관람객들도 역시 전시장에서 작품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영역으로 초대받는다. 분석하기 전에 먼저 느끼고, 방향을 찾기 전에 일단 길을 잃어보는 게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제안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든 작가는 삶의 크기(스칼라)보다 방향(벡터)이 중요한 시기라고 스스로를 진단하는 듯하다. 허 작가의 이번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진짜 화살표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허준 개인전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


장종회 한국금융신문 기자 jh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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