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립자’ 역할 어디로?
우리나라는 보험업법상 교통사고 등 보험사고가 발생했을 때 손해액이나 보험금을 결정하는 데 있어 보험소비자의 권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손해사정사 제도를 두고 있다. 이는 손해액이나 보험금을 산정하는 권한이 보험사에만 주어질 경우 소비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어 전문자격을 가진 손해사정사로 하여금 보험사와 소비자 간 중립적 위치에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보험금을 산출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소비자와 보험사의 중립적인 위치에 있어야 할 손해사정사가 실질적으로는 보험사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얻지 못하고 종속되어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독립성’ 확보 시급… 보험금 지급관련 민원 급증
손사업계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보험사들이 손해사정법인을 자회사 형태로 두고 있고, 실질적으로 보험사가 손해사정업무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며, “‘손해사정사’는 없고, ‘보험사’만 있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보험사들이 자신들이 정한 약관상 지급기준에도 못 미치는 금액을 제시토록 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실제 대부분의 보험사들이 손사법인 자회사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으며, 발생하는 보험사고의 대부분을 자회사를 통해 처리하고 있다.
손보업계 한 관계자는 “손해사정의 대부분을 자회사에 맡기고 있으며, 고액건은 보통 자회사에, 일부 금액이 낮은 건들에 대해서는 위탁해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위탁손사의 경우 현재 보수기준에 대한 명시적 규정이 없어 보험사가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기 쉽다. 실제로 업계에선 보험사 자회사와 일반손사법인에 별도약정으로 차별 적용하는 불공정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보험사의 경우 위탁손사 입찰시 가격부문에 비중을 많이 배정하거나 보수 하향조정을 암묵적으로 요구해 손사법인들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저가입찰에 참여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손사업계 관계자는 “수수료가 10년째 제자리”라고 토로할 정도다.
보험사로부터 수주압박을 받는 손사법인으로선 저가 입찰방식으로 계약체결을 하다 보니 인건비나 비용지출을 줄이게 되고 이는 손해사정의 질 저하로 이어져, 일처리에 불만이 생긴 피보험자 등 보험사고 관계자들의 보험금 지급관련 민원 발생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반대로 소비자가 선임하는 독립손사의 경우 보험계약자에게 과도한 선임 보수를 요구해 이 역시 민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 공정성 확보 위한 제도마련 요구
보험선진국의 경우 손해사정은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정립되어 있다. 소비자들이 보험금 결정에 대해 불신을 갖도록 하지 않기 위함이다. 손해사정은 무엇보다 공정성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제도적인 장치이다. 때문에 현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독립성을 확보해 공정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업계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손해사정사회 김명규 사무총장은 “보험사 중심의 손해사정 제도를 보험소비자 중심 손해사정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보험사가 자기손해사정을 하지 못하도록 순차적으로 고용의무제도를 폐지하고, 자회사의 경우도 자기 손해사정 금지규정을 적용토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보험사와 소비자가 공동손해사정을 희망하는 경우 위탁손사나 독립손사에 공동으로 손해사정해 보험금을 결정하도록 하면,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뿐 아니라 객관성과 공정성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손해사정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중재기구를 설치해 민원 발생을 초기에 줄이는 방안도 논의돼야 할 것으로 지적했다. 손사법인들의 보수체계 마련 또한 시급하다. 손해사정사회에서는 손해사정사 보수체계를 매년 정기적으로 외부 전문기관에 용역을 의뢰, 이해관계자(손해사정사, 생·손보협회, 소비자단체 등)들이 참여하는 기구를 설치해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방안을 금융당국에 건의했으며, 이러한 문제점을 알리고 공론화하기 위한 공청회를 준비 중에 있다.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경우 현재 보험업계의 가장 큰 화두인 ‘민원감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김미리내 기자 pannil@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