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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시 3년만의 침체 멋지게 ‘반전’

정희윤 기자

simmoo@

기사입력 : 2005-06-26 20:48

한국PF금융 경쟁력을 해부한다<2>PF도입기와 침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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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싣는 순서

1.왜 PF금융이며 PF란?

2.PF도입기와 침체기

3.PF중흥 어떻게 가능했나

4.국내 PF금융의 실상

5.과제와 앞날

국내 금융기관이 PF업무 전담 직원을 두고 일을 보기 시작한 때는 94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정부 재정만으로 경제 개발과 사회 인프라 확충을 할 수 없게 되자 정부는 그 해 8월 ‘사화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간자본유치촉진법’(민촉법)을 제정해 민간자본 참여의 길을 텄다.

산업은행은 민촉법 제정 과정에서부터 정부에 자문을 제공하며 법제도 준비를 지원하는 동시에 PF금융 도입을 위한 실질적 준비에 나선다.

산은은 94년 7월 사회간접자본팀을 만들어 국내 금융기관 PF전담 독립 조직의 시초를 이뤘다.



◇ 94년 업무 시작 겉보기 화려하게 95년 출발= 이어 산은은 민촉법을 바탕으로 한국금융사 첫 PF금융주선 사례가 된 95년 신공항고속도로 건설사업에 금융주선을 성사시켰다.

당시 금융주선 총액은 1조3000억원. 산업은행이 2950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웬만한 은행들이 모두 참여했고 약정식에는 거물 은행장들이 대거 참석했다고 한다.

비록 일부 은행엔 형식적이었을 지언정 국내은행 대부분에게 95년은 PF금융 원년인 셈이다.

첫 사례인데도 금융주선 규모로는 요즘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견주어 꿀릴 게 전혀 없을 정도로 크다. 신법을 만든 정부가 성과를 내기 위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결과로 풀이되고 있다.

지금은 규제가 없어졌지만 당시 은행법은 만기 10년 이상 대출이 금지돼 있어 금융통화위원회 승인을 받고 이뤄질 수 있었다.

PF금융 첫 걸음이 관의 입김을 타고 초호화 출범을 한 반면에 같은 해 2호로 이뤄진 경북 문경 인근의 이화령터널 사업은 최근까지도 소송이 계속되는 비극도 안고 있다.

도입기 PF금융은 규모도 작았고 불안정했다.

96년엔 아예 내놓을 만한 건수가 없었다. 훗날 국민은행에 합병된 장기신용은행이 그 해 PF금융이 될성부른 나무 임을 알아보고 투자개발팀을 신설한 데서 위안 삼을 정도.

97년엔 광주 제2순환도로에 1350억원을 주선하고 인천국제공항 국적항공쪽과 외항사쪽 화물터미널 관련 금융주선이 이뤄졌지만 외환위기의 시련은 이 분야에도 혹독했다.



민촉법 힘입어 95년 첫 삽, IMF로 냉각

2000년 재기노력 집중 兆단위 시대 열어



◇ 외환위기 금융빙하기 딛고 99년 재개= 98년은 외환위기 직후 국내 금융기관 상당수가 퇴출 당하는 와중에 자금여력이 떨어지고 리스크관리에 여념이 없는 한 겨울이었다. 이 시기 외국계 금융기관의 무책임한 마케팅이 활개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99년 인천국제공항 열병합발전소에 1540억원을 주선하며 국내 금융기관들은 몸을 추스렸고, 토종 PF금융은 2000년 들어 침체기 터널의 끝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98년 12월 정부가 민촉법을 ‘사회간접자본시설에대한민간투자법’으로 전면 개정해 SOC사업의 투자촉진을 유도한 것도 한 몫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양·부천 열병합발전소 매각 건에 5290억원의 금융주선이 이뤄졌고 인천국제공항 후기시설, 철마산과 백양산터널을 각각 성사시킨 여세를 몰아 대구-부산간 고속도로에 1조1000억원 규모로 금융주선하는 일이 성사됐다.

“금융기관들이 자력으로 1조원 규모의 PF금융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산은 김영찬 이사는 평가했다.



◇ 중흥기 맞으려 끈기 있게 체력비축= 하지만 은행들이 마냥 주저앉았던 것만은 아니다.

산업은행이 2001년 천안-논산간 고속도로에 대해 금융지원 후 전액 대출자산유동화채권(ABS) 발행으로 대출금을 회수할 수 있었던 것은, 97년 이 건에 대한 신디케이션 실패는 물론 PF금융 침체 국면에도 굴하지 않고 성사노력을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옛 국민은행이 장기신용은행을 합병한 뒤에도 투자개발팀을 유지한 뒤 투자금융실로 조직을 일부 손질해, 한 유닛에 SOC PF를 맡김으로써 PF금융에 손을 놓지 않은 것도 앞날을 내다 본 선택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국내 PF시장이 침체기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 시동을 걸었던 99년엔 해외 PF를 향한 역량의 개화기를 일구었다.

수출입은행은 99년 마침내 PF전담팀을 독립 조직으로 꾸렸다. 이후 SK건설이 참여한 멕시코 Madero 정유설비프로젝트에 2억달러를 지원한 데 이어 2000년엔 한전이 지분투자를 하고 대림산업이 설비를 공급했던 필리핀 일리한 화력발전 프로젝트에 수출금융을 순수한 PF방식으로 처음 지원하는 변신에 성공했다.

▲ 지난 2000년 12월 국내 PF금융 규모 1조원대 시대를 열었던 대구-부산간 고속도로 금융주선 당시 서명식에서 주역들이 밝게 웃고 있다.

  • 한국PF금융 경쟁력을 해부한다 <1>왜 PF금융이며 PF란?



    정희윤 기자 simmoo@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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