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계는 언론들의 융단폭격 수준의 공세와 금융감독 당국의 주문에 하는 수 없이 수수료 인하 방안을 수용하는 모양새다. 금융계 내에서는 안일하게 대처하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다는 자성의 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금융업의 근간을 위협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품기 시작한 것 또한 사실이다.
◇ 체감경기 파탄 따른 분노가 원동력 ↔ 상대적 호황 사회환원 압박
미국의 반월가 시위는 벌써 한 달을 넘어섰다. 지난 9월 17일 뉴욕 월가 인근 주코티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는 “월가를 점령하라(Occuopy Wall Street)”는 구호를 중심으로 번졌다. 2000년 이후 빈곤율이 꾸준히 늘어 왔고 주택가격은 폭락한 반면 중산층 이하 소득은 줄거나 소폭 상승하는데 그치는 등 상당수 미국인에겐 경제 파탄 상태의 고통 내지는 박탈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 시민들이 월가를 타깃으로 삼은 것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이후 올랐던 모기지론 금리부담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반면에 전 세계에 악명을 떨친 성과급 등 거액 급여 잔치 등이 융합된 결과로 풀이된다. 이제 마이클 샌덜 교수가 “이익은 사유화, 손실은 사회화”라며 미국 금융시스템의 불공정성을 직격했던 표현은 우리 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상태다. 이같은 반월가 시위 확산은 우리 사회 오피니언리더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곧바로 한국적 적용이 이뤄진 것이 최근 은행권과 카드업계를 겨냥한 수수료 적정성 논란과 대대적인 인하 압박인 셈이다.
◇ 소비자부담 감축의 편익은 차려 놓은 밥상
대다수 국민이 체감하기에 경기가 좋아진 것도 아닌데 은행과 카드사를 비롯해 보험사까지 큰 규모의 이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자 ‘이익의 사회화’ 요구가 봇물을 이뤘다. 가장 대표적인 논리는 ‘사상최대 이자이익과 수수료이익이 예상되는데 결코 은행(원들)이 경영을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금융시스템을 재건했던 역사적 연원’을 거론하자 배당 자제-’연봉과 성과급 돈잔치’ 금지-소비자 부담 감면 3종 세트를 향한 국민적 공감대가 극대화됐다. 금융계는 지금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체념하는 분위기가 표면을 지배하고 있다.
대형은행 한 임원은 “금융업 종사자가 아닌 모든 사람이 소비자인데 소비자의 부담을 줄이자는데 반대할 사람이 많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뜻있는 전문가와 금융계 인사들은 체계적인 검토와 점검 없이 일사천리, 초고속으로 수수료 인하작업이 진행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한 은행지주사 고위관계자는 “금융회사들이 감내 가능한 하한선이 어디쯤인지 금융사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텐데 언론보도를 보면 가이드라인이 주어져 있고 일률적으로 가는 듯한 분위기”라고 살핀 뒤 “금융회사 건전성과 수익성을 충분히 감안해서 검토를 해도 될 일인데 여론재판 직후 집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 금융회사 패러다임 재정립 계기될까
아울러 뜻 있는 전문가들은 대한민국 금융계를 지배해온 패러다임을 허물고 재구성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익명을 청한 한 민간연구기관 중견 연구자는 “카드사들은 아직 수익성과 건전성이 안정된 단계라고 보기 어려우니까 논외로 하더라도 은행의 경우 공공성을 위주로 하고 이익의 사회화를 추구해야 할 것인지 수익창출을 기본으로 하는 금융기업으로 간주할 것인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자마진이 너무 심하다 아니다, 수수료 항목이나 소비자 부담이 크다 적다는 그 다음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물론 이같은 시각에 대해 일선 금융인들은 회의적이다. 외환위기 직후 수익성과 건전성 준수를 채근하던 금융당국이 이익 일부를 포기한 채 소비자에게 환원하라고 앞장서는 상황에서 혼란스런 감정만 극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이러지 말고 ‘수수료 체계개선의 모범규준’ 같은 거라도 진지하게 만들어서 모두가 만족하는 방안을 찾아봅시다”라고 제안할 여지 조차 전혀 주어지지 않는 막다른 상황까지 어느새 떠밀려 버린 탓이다.
정희윤 기자 simmoo@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