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들어 23일까지 국내은행 실세총예금은 14조 2188억원 빠진 반면 증권사 RP매도는 약 1조 6200억원 늘고 자산운용사 MMF는 10조원 가까이 늘었다. 통화당국은 경기를 살리는 데 힘을 보태겠노라 비장한 각오로 지난 5월 기준금리를 한 번 더 내렸는데 돈은 실물경제로 돌지 않고 시장금리의 굴절과 시중자금 단기부동화에만 영향을 끼치는 양상이다.
이 와중에 외환위기 수습과정에서 역대 정부가 추구했던 대형화·겸업화 정책이 시중자금 쏠림과 자금중개기능 마비를 더욱 부채질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적 지적이 일각으로부터 대두했다. 글로벌 불안요인이 상존하는 가운데 나라 안으로 저성장·저금리 시대를 맞고 보니 대형은행이 쥐락펴락하는 금융시장이 전혀 위기탈출의 동력 찾기에 부적합함을 알려 주는 사례만 양산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 말초적 광고 “은행에 적금들지 마라”선동이 그대로 적중
한국은행이 범위를 국내은행에 한정해 영업일마다 집계하는 ‘금융시장 주요지표’ 여수신 동향에 따르면 올해 들어 은행 실세총예금 월별 증감분을 상쇄시킨 결과 약 3조 5000억원 늘어나는데 그쳤다. 요구불예금도 줄고 만기가 다양한 예금까지 골고루 줄었다. 은행 요구불예금에 가까운 증권사 CMA는 약 8500억원 늘어나는데 그쳤다.
반면에 자산운용사 MMF는 15조 6000억원이나 늘었다. 증권사가 초단기 상품인 RP를 매도한 잔액은 10조 7347억원 늘었다.
은행 예금이나 증권사나 종금사 CMA에 넣어 놓느니 MMF나 RP 같은 초단기 상품에 돈을 맡겨 놓았다가 투자 유망 자산군이 눈에 들어온 뒤에야 움직이겠다는 보신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증거로 보인다. 예금성 상품에서 그야 말로 자본시장 상품으로 갈아 탄 것이라면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에 훈풍이 불어야겠지만 단기 상품에 극단적으로 쏠리는 모습이어서 단기금융시장만 비정상으로 유동성이 풍부해진 상황이다.
통화당국이 노린 것은 기준금리를 낮추면 금융비용이 낮아져 민간소비와 기업투자 확대에 도움될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실물경제는 딴 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익명을 청한 민간 금융연구기관 한 전문가는 “금리가 싸니까 꼭 필요한 곳에 쓸 자금을 빌리긴 하겠지만 소비를 늘리기엔 경기 전망이 너무 불투명하다는 생각에 움츠러 든 탓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은행적금 절대 들지 마라는 인터넷 광고가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적중하고 있는 대신에 예금성 상품에서 빠진 자금이 다른 권역 단기상품에 쏠리는 것은 결국 투자심리 위축과 자금중개기능이 마비가 겹친 탓이라는 지적도 일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박덕배 연구위원은 ‘최근 부동자금의 급증과 시사점’보고서에서 기업투자활성화와 가계 자금을 자본시장으로 유도하는 부동자금 선순환 대책을 점진적으로 면밀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 대형시중은행 자금공급 확대 폭 그리 크지 않아
전체 국내 은행 합계치로 예금이 조금 늘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외환위기 후 대형화 정책에 편승해 덩치를 키운 대형시중은행들 다수는 예금이 빠지는 추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 은행채 잔액이 줄어드는 추세도 지속되면서 은행채는 새로 찍는 것보다 갚아버리는 규모가 더 큰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중 유동성이 풍부하다는 논리로 예금이 빠지는 와중에 은행채를 줄이는 전략이 가능했던 이유는 역시나 자금중개 역할을 소극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은 금융시장지표에 집계되는 국내은행 대출은 27조 5635억원 늘어나는데 그쳤다. 새 정부 출범 초기 경기부양정책 부응한다면 은행 대출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던 터였다. 한데, 대형시중은행 증가폭은 기여도가 낮았을 것이 유력하다.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이 상반기 원화대출금을 각각 약 5.5조원과 4.3조원 늘렸을 뿐 나머지 대형시중은행은 1~2조원 늘리는데 그쳤다. 총자산이 200조원에 근접하기라도 해야 4대은행 또는 5대은행에 꼽히는 시절에 와서 반기 내내 자금공급한 규모가 2조원 미만인 것은 자금중개기능이 크게 미흡하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는 지적이 인다. 이 때문에 금융계 일각과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결과적으로 대형은행 위주로 재편된 현재 금융산업구조로는 저성장-저금리 대외 불안요인 돌파 할 역동성이 금융계에서 뿜어져 나오기 어려운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하는 지경이 됐다.
대형시중은행 무용론은 결국 금융정책 패러다임을 원점부터 다시 모색해야 하는 근거가 되겠지만 금융정책과 감독정책을 통합해서 틀어쥔 금융당국이 시대적 과제로 인정할지는 두고 볼 일이라는 지적 또한 뒤따르고 있다.
정희윤 기자 simmoo@f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