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총재는 “한국경제가 외환위기를 맞게 된 것은 고임금시대로의 이행, 차입의존 성장의 한계, 국민생활의 기본욕구 변화 등 한국경제의 발전단계적 변화가 디지털 혁명, 개방화의 진전 등 경제성장 환경의 외부적인 변화와 맞물린 데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했다.
또한 박 총재는 “한국경제가 위기에서 빠른 시일내에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기업, 금융, 정부, 노동 등 4대 부문의 과감한 구조개혁 추진으로 새로운 성장환경에 적응하는 새로운 성장구조의 마련에 주력한데 힘입었다”며 “특히 신속한 공적자금 투입을 배경으로 부실금융기관의 정리 등 신속하고도 과감한 금융개혁 이른바 압축개혁이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 총재는 “한국은 금년중 경기회복이 점차 본격화되면서 연중 5.7% 정도의 경제성장이 예상되어 잠재성장률을 다소 초과할 우려가 있다”며 “시장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온건한 범위에서 경기속도조절 및 물가안정 노력을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아래는 박승 총재 강연 원문이다.
Ⅰ. 성장환경의 변화
역사환경의 변화에는 동일한 생존질서의 틀 안에서 일어나는 연속적 한계적 변화가 있고 생존질서 자체가 달라지게 되는 단층적(斷層的) 구조적 변화가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겪었던 수많은 경제위기들은 전자에 속하고 지금 겪고 있는 경제위기는 후자에 속합니다. 현 위기에 대처함에 있어서 이점을 분명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1997년말의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한국경제가 경험한 경제위기는 이러한 성장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한국경제가 적응하지 못한 데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성장환경의 변화는 한국경제의 발전 단계적 변화와 외부적 성장환경의 변화가 맞물려서 일어난 것입니다.
(1) 한국경제의 발전 단계적 변화
한국경제는 1960년대 이후 40년 간의 고도성장에 성공하여 드디어 완전고용 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경제의 발전단계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가는 초기적 단계에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후기적 단계로, 그리고 인력과잉 단계에서 인력부족 단계로 이행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발전단계의 이행은 한국경제의 성장과 국민생활의 내용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변화를 유발하였습니다.
첫째로 고임금 시대로의 이행(移行)입니다. 이에 따라 저임금 저기술의 기업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로 차입(借入)성장이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공급부족과 이로 인한 투자의 고수익성 그리고 고율의 인플레 효과 때문에 기업들은 부실한 재무구조 하에서도 차입에 의존하는 성장이 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빚을 많이 지는 기업일수록 큰 기업으로 성장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잉시설로 인해 투자수익률은 하락하고 물가는 안정되면서 이제 빚 많은 기업은 살아 남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국민생활의 내용이 양(量)의 시대에서 질(質)의 시대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양의 시대라 함은 국민생활의 기본욕구가 의식주(衣食住) 등 물질임을 뜻하며 질의 시대라 함은 국민생활의 기본욕구가 생활환경, 교통, 사회질서, 교육, 의료, 사회보장, 휴식공간 등의 서비스임을 뜻합니다. 의식주와 같은 물질은 개개인이 각각 해결할 수 있는 개별재(個別財)이며 환경이나 교통과 같은 서비스는 함께 생산해서 함께 소비할 수밖에 없는 사회 공공재라는 것이 크게 다릅니다.
(2) 경제 외부적 성장환경의 변화
우리나라 경제 성장환경의 외부적인 변화요인으로서는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디지털 기술에 의하여 정보통신 혁명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산업사회는 지식사회로 이행하면서 기술환경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농경사회 이전 생산의 중심은 사람의 노동이었습니다. 이것이 산업사회에 와서는 기계 즉 자본으로 변했으며, 이것이 지금에는 다시 사람의 머리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술환경이 바뀜에 따라 우리 사회의 모든 기준이 변화의 급류를 타고 있습니다. 생산의 개념도 달라지고 있고 시장(市場)의 개념이나 재산의 개념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오랫동안 염원하였던 대로 시간과 공간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인간사회는 평면시대에서 입체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사고(思考)와 인식도 달라져야 할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보호시대에서 개방시대로의 이행입니다. 이것은 비교(比較)우위시대에서 절대(絶對)우위시대로의 이행을 의미합니다. 잘 두는 사람과 못 두는 사람 사이의 바둑 시합에 비유한다면 못 두는 사람이 미리 몇 점을 놓고 두는 아마추어의 경기를 보호질서라 한다면 동일한 조건에서 막 두어서 승부를 가르는 프로의 세계는 개방질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질서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약자도 살아 남을 수 있지만 개방질서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Ⅱ. 한국경제의 위기와 극복
한국은 1960년부터 본격적인 경제개발에 착수하여 1997년의 외환위기를 맞기까지 약 40년 동안에 연평균 약 8%의 고도성장을 이룩했습니다. 1961년과 1997년을 비교하면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에서 약 1만 달러로, 수출은 4천만 달러에서 1,400억 달러로 증가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은 불과 한 세대(世代)사이에 절대빈곤 문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선진국들이 100년 이상 걸려 이룩한 근대화 과업을 40년으로 단축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압축성장(壓縮成長)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동안의 이러한 경제성장은 낡은 성장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임금, 차입에 의한 성장, 보호주의적 성장, 정부 주도적 성장, 아날로그의 기술환경, 그래서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 그러한 성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장구조는 성장환경이 급변하면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국경제가 자본시장의 개방에 노출되면서 1997년말 외환위기를 겪게 되고 드디어 IMF의 구제금융에 의해서 국가부도사태를 모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한국경제는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지금까지 약 4년 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기업·금융·정부·노동 등 4대 부문의 과감한 구조개혁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개혁은 바로 새로운 성장환경에 적응하는 새로운 성장구조를 만드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업이 대체로 2001년까지 마무리되어 한국경제는 이제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한국경제의 지난 4년 간을 회고해 본다면, 1997년말의 금융위기 사태로 인하여 약 3만개의 기업들이 도산하였으며 그 부채는 모두 금융기관에 떠넘겨겼습니다. 금융위기가 나던 해인 1997년말의 전 금융기관 부실채권 규모는 44조원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금융위기 사태 직후인 1998년 6월 현재의 부실채권(새로운 자산건전성분류기준인 FLC 기준)은 136조원으로 급증하였습니다. 당시 전체 대출액의 20%가 넘었습니다. 부실채권의 60~70%를 차지했던 한국 은행권의 전체 납입자본금 합계가 15조원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막대한 규모의 부실채권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경제는 비로소 심각한 혼란과 불황 그리고 도산과 실업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기업이 쓰러져서 은행이 부실화하고 은행이 부실화하면 다시 기업이 부실화합니다. 그러니까 부실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부실의 악순환이 지난 4년 동안 한국 경제위기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악순환이 바로 한국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고 우리 민생경제를 어렵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세계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해결한 것이 한국입니다. 한국은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해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정부가 104조원의 공적자금(公的資金)을 조성하여 금융기관에 투입했습니다. 과거에도 한국은 부실기업이나 부실은행을 구출한 일이 많이 있었는데 그 때는 조세와 통화증발에 의한 특혜금융 등으로 해결했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된 오늘의 상황에서는 그러한 방법을 쓸 수 없었습니다. 공적자금이란 정부가 보증한 예금보험공사의 채권(債券)입니다.
이와 더불어 금융개혁이 과감하게 추진되었습니다. 은행은 퇴출과 합병 등을 통해 그 수가 33개에서 20개로 줄었으며 은행원의 수는 40%나 감소하였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빠르고 강력한 압축개혁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부실은행을 과감히 정리한 결과 한국의 금융시스템은 2001년까지 건강을 거의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136조원까지 이르렀던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은 2001년말 현재 약 19조원으로 줄어들고 금융기관 총대출의 20% 수준까지 이르렀던 부실대출금의 비율도 3% 수준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하여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던 은행들이 2001년에는 대손충당금을 적립하기 이전의 기준으로 무려 16조원에 이르는 영업이익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당기순이익도 5조 3천억원에 달하였습니다. 올해에는 당기순이익이 지난해의 배 수준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렇게 금융시스템이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1997년 12월에 39억 달러까지 내려갔던 외환보유액이 현재 1,080억 달러에 이름으로써 한국경제는 올해부터 위기의 터널에서 벗어나 힘찬 회생(回生)의 길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한국을 금융위기 극복에 있어서 모범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끝으로 현재 한국경제의 실태는 어떤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국경제의 성장률을 보면 1997년에 5.0%, IMF 외환위기 다음해인 1998년에는 -6.7%, 1999년에는 10.9%, 2000년에는 9.3%였으며 지난해에는 심각한 불황으로 3.0%의 저성장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올해 들어서는 상반기에 5.3%, 하반기에 6.2%, 그래서 5.7%의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잠재성장률이란 물가안정을 지키면서 이룩할 수 있는 최대성장률을 말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대체로 5~5.5%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경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초과하면 인플레 우려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다소 초과할 우려가 있으니까 경기조절에 대한 노력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잠재성장률을 초과하는 정도가 크지 않으므로 경기속도조절 노력이나 물가안정 노력은 시장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온건한 범위에 그쳐도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2002. 5. 9.
한국은행 총재 박 승
관리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