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만 하더라도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으로 대학 졸업생들에게 장기신용은행과 함께 선호도 1~2위를 다투던 은행이다. 이렇게 이 이사는 금융권에 첫 발을 내딛은 후 인정받는 금융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시련이 다가온 것은 온 나라가 금융위기로 혼란을 겪고 있을 때인 IMF(국제기금) 구제요청 때였다. 나라의 경제 위기가 결국 그에게도 태풍으로 다가와 잘 나가던 한 금융인을 시련 속으로 내 몰게 된 것이다.
IMF 후 금융권 구조조정이 한참인 때 몇 개 은행과 함께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국책증권사도 함께 문을 닫았다. 당시 1998년 7월.
이때 산업증권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350명 전원이 모두 강제 퇴직됐다. 당시 직원들은 오늘날의 명예퇴직금은 고사하고 재직 중 중간 정산해 받은 퇴직금이 모두 주식에 투자돼 있어 말 그대로 ‘빈털터리’로 회사를 나오게 됐다.
더욱이 재직 중에 전세금 대출금을 받은 직원들은 이를 반납하고 퇴직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더욱 어려웠다. 이 이사도 그 중 한사람이다. 이 때 나이 30대 중반.
이후 그는 수 없이 많은 곳에 이력서를 보냈다. 무려 200개 업체가 넘는다고 한다.
산업은행에 당당히 입행했던 그였지만 3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큰 걸림돌로 여겨졌다.
그후 더 많은 시간을 어렵게 보내고 결국 한 요식업체에 취직해 잡일을 하게 됐다. 그때 당시 그가 받았던 급여는 50만원. 그 돈으로는 한창 크고 있는 아이들 분유와 기저귀 사기에도 힘들었다.
그가 다시 선택한 일은 보험 영업이었다. 당시 그는 꽤 좋은 실적을 기록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시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다가왔다.
산업증권 막바지 노조사무국 일원으로 100일 농성을 하면서 몸을 돌보지 못한 탓에 그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온몸이 아파서 병원을 6개월 동안 다녔고 술·담배도 끊었다. 그로 인해 결국 보험 영업직도 그만 두게 됐다. 이후 다시 금융부띠끄를 전문으로하는 벤처기업에 입사, 그러나 그 회사도 결국 상황이 어려워지게 돼 2년만에 다시 퇴사를 하게 됐고, 또 다른 벤처 회사를 들어갔으나 사장의 부도덕함 때문에 결국 그 회사도 퇴사를 하게 돼 ‘터널’의 끝은 좀체 보이질 않았다.
암울한 삶이 지속되던 어느날 “같이 한 번 해보자”는 옛 동료의 제의가 왔고 그는 그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때가 2003년 6월. 그리고 그 곳에서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최선을 다했다. 바로 그 회사가 현재 금융권에서 많은 수주 기록을 보이며 성장하고 있는 현 재직 중인 업체다.
당시만 해도 직원이 40명에 불과했던 회사가 지금은 100여명으로 늘어났고 그만큼 매출과 사업도 확대됐다.
“누구나 힘든 시절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힘든 시절을 꿋꿋이 참고 넘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혜권 기자 hkshin@fntimes.com